본문 바로가기
움 다이어리

[빨간머리 앤] 차별과 금기 너머 따뜻한 공동체를 꿈꾸며

by 움이야기 2020. 5. 30.

 

'빨간머리 앤'은 어디선가 읽은 듯하지만 대강의 줄거리만 아는 책이었습니다. 아마도 어렸을 때 아주 축약된 동화책으로 만났기 때문일 거예요. 그러다 어른이 되어 완역본 <빨간머리 앤>, <에이번리의 앤>, <레드먼드의 앤> 시리즈를 딸들과 같이 읽었지요. 재미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들어와 머물지는 못하고 지나가 버렸습니다. 책이든 영화든 타이밍이 있는데 때가 아니었나 봅니다.

그러다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 <빨간머리 앤>을 봤습니다.
첫 편에서는 말도 너무 많고 감성이 과도한 앤을 보는 게 별로 탐탁지 않았지요. 보다 중단하고 계속 볼까 말까 망설이기도 했고요. 그러다 어느새 시즌 1, 2, 3을 쭉 이어 보고 아직 끝나지도 않은 드라마의 리뷰를 씁니다. 이건 정말 '내 인생의 드라마'라고 조금은 흥분된 마음으로, 안 보신 분들은 꼭 보시기를 추천하면서요.

<빨간머리 앤>은 고아원에서 자라던 앤이 에이번리의 초록 지붕 집에 잘못 보내지면서 시작합니다.
일을 도와줄 남자아이를 원했으나 착오로 여자아이 앤이 갔고 우여곡절 끝에 가족이 되었지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상상력을 잃지 않고 우정을 쌓아가며 어른이 되는 앤의 멋진 성장 드라마입니다.
또한 아주 훌륭한 여성주의 드라마기도 하지요.
'여자라서 안된다'는 구시대의 편견과 관행에 도전하며 당당히 '나'의 꿈과 미래를 찾아가는 소녀들, 그리고 그들의 멘토 스테이시 선생님의 연대와 용감함으로 보수적인 시골 마을은 바뀌기 시작합니다.
성 추문을 권력으로 이용하는 남성 중심주의에 대항하고 당당히 마을의 구성원으로 목소리를 내는 에이번리 여성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금기와 한계를 넘어 반짝이는 마음속 보물을 따라 자신의 삶을 살겠다고 선언하는 소녀들의 '여자라서 행복해'라는 고백에 가슴 뭉클했습니다.

또한, <빨간머리 앤>에서는 동성애, 유색 인종, 아메리칸 원주민들에 대한 차별을 정면으로 다룹니다.
패혈증으로 죽어가는 흑인 여성 메리의 마지막을 함께 하는 에이번리 사람들의 부활절 모임은 제가 꼽는 가장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저 또한 죽은 다음 장례 말고 이런 마지막을 맞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다름이 틀림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존중과 공동체의 따뜻함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작가는 드라마 속에서 꾸준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너른 초원과 깎아지른 듯 절벽, 눈부시게 푸른 바다, 숲속의 아름다운 들꽃들, 화덕에 빵을 굽고 차를 마시는 소박한 에이번리의 전원 풍경은 보너스. 탄탄한 스토리에 더해 제 마음을 사로잡은 일등 공신이랍니다.

퀸스칼리지에 진학하면서 도시로 떠난 앤의 이야기를 담게 될 시즌 4가 무척 기다려집니다.
덮어 두었던 책을 다시 꺼내 읽으며 다음 이야기를 기다려야겠습니다.
지루하고 불안하고 우울하기 쉬운 코로나 시대에 재미있고 뭉클하고 통쾌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원하신다면 <빨간머리 앤>을  꼭 보시라 추천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