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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 다이어리

NHS, 공감과 신뢰의 제도

by 움이야기 2013. 3. 10.

삼월입니다. 

학교를 너무 오래 다녀서 그런지 저에게 늘 한해의 시작은 삼월이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새 책도 곱게 싸고, 새 노트, 새 학용품도 준비하고 올해는 어떤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날까 설레이는 마음으로 시작했던 그 기분이 오랜 습관처럼 남아있는 거겠죠. 게다가 '춘삼월', 바로 봄이니 말이지요. 

유난히 추웠던 겨울이었던듯한데 한국의 삼월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여기 Durham은 여전히 비가 왔다, 바람이 불었다, 해가 쨍하게 나왔다, 여전히 예측할 수 없는 날씨지만 그래도 얼었던 땅에서 하나 둘씩 싹이 올라오고 있고 꽃도 피는거 보니 봄입니다. 다만, 이제 한 주만 지나면 부활절 방학에 들어가니 시작보다는 정리하고 마무리하는 분위기입니다. 


오늘 트위터를 보다가 <영국 무상의료가 정말 1200명을 죽였을까>라는 기사를 봤습니다. 건강보험 보장률을 현재의 63%에서 80%까지 늘리겠다는 새 정부의 정책에 대해 이런저런 논란이 있는 듯 합니다. 아플 때 가장 적절하고 질좋은 치료를 받을 권리, 의료정책의 큰 그림을 그리고 방향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많은 관심과 논의가 필요한 분야일 듯 싶습니다. 


저는 이번 학기 '현장연구 프로젝트'의 하나로 'Durham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이 몸이 아플 때 어떻게 대처하고 어떤 치료를 선택하는지, 평소 건강관리를 어떻게 하고, NHS 의료시스템을 어떻게 경험하고 있는지'를 연구하였습니다. 인류학에서는 이를 'Health-seeking behaviour'라고 하는데 치료 종류나 순서를 결정하는 요인이 각기 다른 사회, 문화적 영향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재미있는 인류학적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전에 저는 주로 인터뷰의 대상이 되곤 했었는데 인터뷰어가 되어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경험도 새로웠구요. 저처럼 온지 얼마 안된 유학생 가족에서부터 오신지 18년 정도 되는 장기 거주자까지 인터뷰를 하였는데요, 같은 한국인이라는 특징 속에서도 장기거주자와 단기거주자, 아이가 있는 집과 없는 집, 이전에 한의학에 많이 노출되었던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또 연령대별로 다른 특징들을 발견할 수 있어 재미있는 연구였습니다. 


비교적 다양한 의견 속에서도 비교적 일반화할 수 있는 의견이 바로 영국의 공공의료, NHS 이용 경험이었습니다. 

물론, NHS 시스템에 대한 가장 공통적이고 긍정적인 의견은 '무상의료'였습니다. 경제적 부담없이 편하게 병원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지요. 한국에 있을 때는 보험이 된다고 하더라도 막상 병원에 가면 병원에서 권하는 비급여진료들이 상당히 많은데 이를 거부하기가 쉽지 않고, 아이치료와 관련된 경우 비급여 진료를 거부할 경우 '나쁜 엄마로 보일 수 있는' 두려움도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의료진에 대한 태도는 '친절'과 '공감', '신뢰'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개인차가 있을 수는 있지만 대부분의 의사들이 너무도 친절하고 환자의 이야기들을 진심으로 걱정하며 들어준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영국에서는 소문 난 대로 약을 많이 주지는 않습니다. 감기같은 가벼운 질병은 그저 푹 쉬도록 하는게 가장 흔한 처방이라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꼭 필요한 경우에는 약을 처방하기 때문에 의사가 약을 처방할 때는 환자도 경각심을 갖고 치료를 잘 따르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의료진의 의견과 처방에 대해서는 신뢰가 매우 높았는데, 다른 연구에서도 영국인의 의사에 대한 높은 신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GP (General Practitioner; 일반의)에 의한 일반진료는 우리나라처럼 바로 그 날 치료를 못 받는 경우는 있어도 대부분 예약을 통해 다음날 치료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소문처럼 오래 기다려야하거나 기다리다 지치거나 그런 경우는 드문 것 같습니다. 다만, GP에서 해결할 수 없는 2차, 3차 치료의 경우 큰 병원의 치료를 받기까지의 대기시간은 좀 긴 편이라는 의견입니다. 

대부분의 치료는 이렇게 NHS 서비스 안에서 무난히 이루어지고, 전문진료나 치료, 수술이 필요한 경우에도 이 안에서 진료비 부담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진료비 부담도 없고 당연히 사보험에 대한 필요도 없이 국가의 건강관리 혜택을 받고 있었습니다.


저는 의료인의 한사람으로서 NHS 체계안에서 의사들의 직업만족도는 어떨까 하는 궁금증이 있습니다. 

환자 한명한명이 수가로 계산되지 않고, 더 많은 치료를 하고 더 많은 약을 처방해야 수가가 올라가는게 아니라면, 의사가 환자를 보는 것 뿐 아니라 병원 운영과 홍보, 비즈니스까지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면 진료의 질은 더 높아질 수 있지 않을까요. 환자 한명한명에 삼십분 이상 할애하여 환자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다면, 환자와 주치의 관계로 생애 긴 과정에서 건강의 조언자로 함께 할 수 있다면 환자뿐 아니라 의사의 삶의 질도 더불어 높아지지 않을까요.

<유러피언 드림, 그 현장을 가다>  라는 기획기사 시리즈는 NHS 시스템에 대한 의사의 입장과 의견들도 담고 있습니다. 


며칠 전 수업시간에 교수님 한분이 유럽의 엘리베이터가 1층부터 시작되는게 아니라 'G (Ground)'에서 시작해 1층, 2층으로 올라가는 것은 (그러니까 영국의 1층은 우리나라로 치면 2층인 셈입니다) '누구나 기본은 누리고, 경쟁과 개인의 몫은 그 이후부터'라는 유럽적 가치를 나타내는 하나의 메타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난하던 부유하던, 누구나 아프면 돈 걱정없이 치료받을 수 있는 사회, 의사도 환자도 만족할 수 있는 의료시스템,

우리도 꿈꾸며 만들어나가면 좋겠습니다. 


새 봄, 모두 건강하고 희망차게 시작하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