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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 다이어리

다시 일년을 시작하며

by 움이야기 2013. 10. 3.

벌써 시월입니다. 

올 여름 무더위가 유난히 기승을 부렸다던 한국에도 어김없이 가을이 왔겠지요. 높고 푸른 가을하늘, 마음까지 상쾌해지는 청명한 공기, 한국의 가을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기도 한데요. 


이 곳 더럼도 가을 분위기가 물씬 풍기고 있습니다. 작년에 왔을 때보다는 훨씬 푸근한 날씨지만 흐리고 바람불고 비 많은, 조금은 우울하고 음습한 전형적인 영국 북동부 날씨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도 새학기를 시작하는 학생들로 시월의 더럼 거리는 어느 때보다도 활기가 넘치고 있습니다.


이 곳에 온 지도 이제 일년이 지났습니다. 작년에 진료실을 떠나면서 일, 이년쯤 걸릴거라는 말씀을 드렸었는데 그걸 기억하시고 혹시 돌아왔는지 최근 전화문의를 주시는 분들이 부쩍 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습니다. 오랫동안 기억해주시는 마음에 감사하고, 일찍 돌아가지 못해 죄송하고, 그래도 조현주 원장님이 워낙 환자분들을 잘 봐주셔서 한편으로는 든든한 마음입니다.


저는 계획했던 일년간의 석사과정은 무사히 마쳤습니다 (사실 아직 논문심사가 안끝난 상태라 정확한 결과는 두고봐야 하지요). 인류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공부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힘든과정이었습니다. 뒤늦게 남의 나라말로 공부를 하는것도 만만치 않았구요. 과정을 마쳤다는 안도감보다 더 컸던게 이제야 겨우 의료인류학에 입문해 조금씩 이 학문의 세계를 맛보기 시작했는데 본격적인 연구는 시작도 못한채 끝내게 되는 아쉬움이었습니다. 학교에서도 제가 계획하고 있는 연구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어서 많은 고민끝에 박사과정을 시작하기로 결정하고 시월부터 새로운 과정의 새학기를 맞았습니다. 


박사과정의 연구주제는 '생식기능을 억제하는 스트레스와 사회적 환경'입니다. 

재생산 (reproduction)의 문제는 인류역사 상 가장 중요한 진화의 조건이기도 합니다. 건강한 후손을 남기기 위해 가장 적절한 환경에서, 가장 적절한 타이밍에 임신을 하도록 진화하였고, 생식에 불리한 환경에서는 생식기능이 억제되어 왔습니다. 음식이 부족하거나 노동력이 많이 필요할 때, 적의 침입위험이 있거나 혹독한 기후조건 등에서 생식기능이 억제되는 것은 그래서 잘못된 병리 (pathology)가 아니라 환경에 대한 적응 (adaptation)의 결과라는 주장들이 있습니다. 저는 현대사회의 극심한 경쟁, 정신적 스트레스 환경을 생식에 우호적이지 않은 환경이라고 가정하고 이를 한국사회라는 사회적 환경속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코티졸, 프로게스테론 등 스트레스와 생식기능을 살펴볼 수 있는 생체지표 (biomarker)의 분석과 함께 스트레스의 기원과 사회구조와의 관계를 살펴보는 인류학적 연구를 병행할 계획입니다. 현장연구를 위해 내년 여름 쯤에는 한국에 들어갈 계획이기 때문에 그때쯤이면 진료실에서 다시 여러분들을 만나뵐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이번 학기부터는 또한 의과대학 학생들의 수업인 'Medicine in Community'라는 과목에서 그룹학습을 도와주는 튜터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의학적 지식을 배우기 전에 먼저 사회와 건강, 의학의 관계를 배우는 영국 의학교육과정에 참여하게 되어서 저에게도 많은 학습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 일년, 잘 살겠습니다. 열심히 배우고 연구하면서 알찬 소식들 전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