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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 다이어리

[움여성한의원 칼럼] 국민 화병의 시대

by 움이야기 2016. 12. 7.

<헬스데이뉴스>에 연재하는 '문현주의 여성의학 움이야기' 스물여섯 번째 칼럼입니다.



문현주의 여성의학(26)


국민 화병의 시대

치료보다 중요한 것은 ‘화’를 꺼내놓고 돌보는 일



‘가슴이 답답하다’, ‘돌덩이를 올려놓은 것 같다’, ‘속에서 천불이 난다’고 호소하는 환자들을 진료실에서 흔히 만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은 연세가 지긋하신 어머니들인데요. 진료를 시작하기 전부터 스스로 정확한 진단명, 즉 ‘화병(火病)’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불(火)이 몸과 마음에 병을 일으킨다는 건 과학적 사고로 보면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화병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질병입니다.


한국인 특유의 문화 증후군, 화병






이처럼 ‘아프다’는 것은 단지 몸의 세포와 조직에 나타나는 이상이나 혈액 속 생화학적 변화뿐 아니라 사회문화적 가치체계를 포함하고 있기도 합니다. 미국정신의학협회에서 만들어 정신과 질병 진단에 널리 쓰이는 <정신질환의 진단과 통계 편람표 개정 4판(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for Mental Disorder, fourth edition, DSM-·Ⅳ)>에서는 화병을 영어로도 ‘Hwa-byung’이라고 표기하며 한국인 특유의 문화 관련 증후군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표현하지 못하고 꾹 참고 눌러놓은 우울과 분노가 임계점을 넘어 신체 증상으로 나타난 것이지요. 시집가서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으로 살아야 했던 가부장제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우리나라 고유의 질병입니다.


꽉 막힌 ‘기’를 자유롭게 소통시켜 주어야





한의학에서 화병은 꽉 막힌 기운이 주원인입니다. 우리 몸을 운용하는 에너지인 ‘기(氣)’는 자유롭게 흐르고 소통되어야 하는데 스트레스를 받으면 ‘기막히다’는 말처럼 기운이 막히고, 이렇게 정체되어 통과하지 못하는 에너지는 화(火)를 발생시키지요.


심장에 화가 생기면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불안하며 가슴 정중앙이 아프기도 합니다. 심장은 ‘임금의 장기’로 우리 몸 전신에 영양을 공급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기운이 꽉 막히고 혈액순환이 안 되니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거나 피곤한 증상이 나타나지요. 이때는 심장의 열을 내려주는 동시에 꽉 막힌 에너지를 소통시켜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한방치료의 초점도 청심(淸心)과 순기(順氣)에 있습니다. 하지만 치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랫동안 가슴 깊이 꾹꾹 눌러놓았던 억울함과 분노, 화를 꺼내놓고 돌보는 일입니다. 나의 아픔이 내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 내 몸과 마음이 오랜 세월 참고 견디느라 참 애썼다고 위로하고 도닥이고 나서야 에너지는 다시 원활하게 소통될 수 있습니다. 살아온 세월의 억울함을 진료실에서 묵묵히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돌덩어리가 훨씬 가벼워졌다는 이야기를 듣곤 하는데요. 꽉 막혀있다 다시 소통된 에너지 덕분입니다.


국민 화병도, 병든 국가도 치료하는 함성이 되길


‘국민 화병의 시대’라고 합니다. 살기 팍팍해도 꾹 참고, 공부하기 힘들어도 꾹 참고, 나라를 위해, 국가안보를 위해 꾹꾹 참았던 사람들이 이제 더 이상 못 참겠다고 아우성입니다. 위임했던 권력은 무능했고 부패했고 책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백만이 넘는 국민이 주말마다 광장에 모여 소리칩니다. 혀를 깨물고 분노를 참는 것보다 고함을 지르는 것이 심장병 예방에 효과적이라는 연구 결과처럼 이 분노의 함성이 국민 화병도 치료하고, 병든 국가도 치료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