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움 다이어리

보건복지부 피임포스터 유감

by 움이야기 2014. 12. 8.

'자기 일은 남에게 미루지 말고 스스로 해라'

당연한 말씀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며, 특히 남성들과 함께 경쟁하며 일하는 여성으로서 책 잡히지 않기 위해 스스로 예민하게 되뇌이는 말입니다. 물론, 지금은 남녀의 기계적 평등(gender equality)보다는 성별에 따른 차이와 맥락을 고려한 공정함(gender equity)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요.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보건복지부의 피임 포스터입니다. 방금 막 쇼핑을 마치고 나왔는지 남자가 여성의 핸드백을 어깨에 맨 채 양손에 쇼핑백을 바리바리 들고 있습니다. 옆에 서있는 여자는 양손은 가볍게, 활짝 웃고 있습니다. 표어는 "다 맡기더라도 피임까지 맡기진 마세요."

 

많은 사람들이 (뭐 부러워서 그런다고도하지만) 남성에게 핸드백을 맡기는 여성을 꼴불견이라고 생각합니다. 뭐가 무거워서 가방까지 맡기냐구요. 그런데 이 포스터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가방 맡기는 것까지는 어찌어찌 봐주겠는데 피임까지 맡기는 여성은 정말.. (의존적이고, 무책임하고...)

 

'피임은 셀프'라는 그럴듯한 말 속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는 여성의 경구피임약 복용 권장입니다. 현재로서는 여성이 알아서 할 수 있는 대표적인 피임이라는 게 결국은 피임약 복용이니까요. 그러나,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호르몬분비를 교란시키면서 인위적으로 배란이 안 되도록 하는 피임약이 여성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많습니다. 피임약이 불임이나 태아기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주장('피임약 불임걱정? 피임약의 오해와 진실')도 있지만,  피임약이 여성의 건강에 미치는 위해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있으며 최근에도 피임약이 난소노화를 빠르게한다는 논문('피임약 복용, 난소 노화 빨라져')이 발표되었습니다. 위험하다는 증거가 명확하지 않더라도, 안전하다고 확신할 수 없다면 피임약 복용을 권장하기보다는 콘돔사용 등의 보다 안전한 피임법을 안내하는 것이 건강을 담당하는 부서의 역할이라고 생각됩니다. 


최근 남성이 복용하는 피임약 개발에 대한 소식도 들려오고 있습니다. 남성의 성욕과 성기능을 저하시키지 않으면서 정자의 기능만 약화시켜 임신이 되지 않도록 하는 피임약이 동물실험을 거쳐 실용화 단계에 가까워졌다는 기사('Male contraceptive pill, a step closer')와 함께 최근 효과가 99% 되는 남성피임약이 인도네시아에서 개발되었다는 소식도 있습니다. '여성이 피임약 먹는 수고를 하니 남성도 하라'가 아니라 이 역시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꼼꼼히 살펴봐야할 것입니다.

 

국가기관은 오랜동안 '프레임의 정치'를 통해 여성의 몸과 재생산에 개입해왔습니다. 1960-80년대는 산아제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치며 아이를 많이 낳는 여성은 전근대적인 여성이며 이로인해 국가경제, 가정경제가 흔들릴 수 있다고 경고하였다면, 90년대 이후에는 급격하게 떨어진 출산율이 문제가 되면서 오히려 출산을 안 하는 여성은 이기적이고 모성이 없는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최근의 보건복지부 피임포스터도 알아서 (경구피임약으로) 피임하지 않는 여성, 남자에게 (콘돔) 피임을 맡기는 여성은 남성에게 가방을 맡기는 것보다 더 의존적이고, 무책임한 여성이라는 프레임을 만들 우려가 있습니다. 한때는 피임약 복용이 여성이 스스로의 몸을 통제하는 수단이며, 자기통제권을 획득하면서 여성해방의 의미가 있다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구의 페미니스트는 피임약 복용을 허가하지 않는 일본정부를 비난하며, 일본 여성들에게도 수동성을 버리고 이에 저항할 것을 촉구했었지요(일본은 1990년에야 피임약 복용을 법적으로 허용했습니다). 그런데 일본 인류학자의 연구(''In accordance with nature: What Japanese women mean by being in control')에 의하면 일본여성들은 몸의 지배/조절(control)에 대해 서구와는 다른 문화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합성호르몬(피임약)이 오히려 여성이 스스로의 몸에 대해 통제권을 행사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으며, 경구피임약 복용이 남녀가 '함께하는 피임'을 '여성만의 피임'으로 만들면서 반쪽의 문제로 전락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냅니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경구피임약을 이용한 피임률이 저조한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정서가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여성의 생식건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여성차별적인 복지부의 피임포스터, 유감입니다.

피임은 남녀가 함께 의논하고 결정해야합니다. 여기서 가장 우선시되어야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건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