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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 다이어리

평등해야 건강하다

by 움이야기 2016. 1. 9.

문현주의 여성의학 (15)


평등해야 건강하다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를 꿈꾸며”


주말 저녁이 되면 만사 제쳐놓고 중학생 딸과 함께 TV 앞에 앉습니다.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보기 위해서죠.



허세 섞인 나이키 운동화에 죠다쉬 청바지, ‘열두 시에 만나요’로 시작하는 CM송이 지금도 입에 딱 달라붙는 아이스크림 광고와 추억이 함께 떠오르는 옛 노래들을 들으며 향수에 젖다 보면 열일곱 그 시절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느낌입니다. 제가 딱 덕선이 나이, ‘1988세대’거든요. 86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을 기념하는 우표를 사려고 새벽부터 우체국 앞에 줄을 서기도 하고, 올림픽 개막일에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자다가 벌떡 일어나 “성화가 서울로 오고 있다!”라고 세 번 외쳤다는 전설이 남아있기도 합니다. 드라마를 함께 보는 중학생 딸은 “엄마, 저때는 진짜 저랬단 말이야? 촌스럽게….” 비웃으면서도 덕선이와 정환, 택이, 보라와 선우의 러브라인에 몰입도 백 퍼센트지요.


저는 무엇보다 쌍문동 좁은 골목길 풍경이 가장 마음에 와 닿습니다. 저도 그랬거든요. 제기동 좁은 골목에서 ‘술래잡기’, ‘다방구’, ‘오징어’, ‘열 발 뛰기’, ‘짬뽕’ 놀이를 하다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이집 저집에서 밥 먹으라는 엄마들 외침이 열 번쯤 있고 나서야 아쉬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곤 했지요. 그때의 친구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공동체가 우리를 건강하게 한다?


그때 우리는 ‘마을’, 거창하게 말하면 ‘공동체’ 안에서 살았습니다. 가진 게 많지 않지만 행복하게요. 그런데 공동체가 우리를 건강하게 한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사회적 지위와 생애 초기에 경험한 스트레스, 그리고 친분 관계를 의료사회학자들은 건강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대표적인 심리사회적 요인으로 꼽고 있는데요. 특히,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의 사망률이 매우 높습니다.


<응답하라 1988>에서도 긴밀한 친분 관계가 생명을 구한 적이 있죠. 술 한잔 하자고 들렀던 덕선 아빠가 뇌출혈로 쓰러진 택이 아빠를 발견하고 급히 병원으로 옮겼는데요. 의사는 조금만 늦었더라면 생명을 잃거나 살았어도 식물인간이 되었을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발병 이후에도 보호자가 없는 택이 아빠를 동네 아줌마들이 교대로 음식을 해주고 돌보면서 빠른 회복을 할 수 있었지요.



 

 



실제 연구에서도 다른 사람들의 따뜻한 지지를 받은 심근경색 환자의 생존확률이 뚜렷하게 높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친화적 인간관계는 면역력도 높입니다.  스트레스 연구학자인 셸던 코헨(Sheldon Cohen)은 건강한 지원자를 다섯 종류의 감기 바이러스에 노출시킨 후 어떤 사람이 감기에 쉽게 걸리는지를 알아보는 재미있는 실험을 했는데요. 놀랍게도 사회적 연결망이 좁은 사람들이 친분 관계가 넓은 사람들에 비해 감기에 걸리는 비율이 네 배 이상이나 높았습니다.


건강을 해치는 것은 가난 그 자체보다 상대적빈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비교적 평등합니다. “평등해야 건강하다”고 주장하는 의료사회학자 리처드 윌킨슨(Richard Wilkinson)은 건강을 해치는 것은 가난 그 자체보다도 상대적 빈곤이라고 강조합니다. 미국 흑인 남성들의 소득이 코스타리카 남성들보다 4배나 높지만, 수명은 9년이나 짧다는 사실을 예로 들면서요.



공동체가 건강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의 이탈리아 공동체, 로세토(Roseto) 연구에 잘 나타나 있는데요. 공동체 안에서 참여관찰을 진행한 연구자는 로세트의 풍경을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로세토에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옷차림과 행동만으로 분간해 내는 것이 극히 어려웠다. 주택이나 자가용과 같은 살림살이들은 매우 단출했고 신기하게도 비슷했다… 로세토에는 이웃에게 거들먹거리며 허세를 부리는 분위기는 발견할 수 없었다…”


<응답하라 1988>에서도 그렇죠. 상금으로 수천만 원을 받는 프로기사의 집이나 복권 당첨으로 졸부가 된 집, 잘못된 빚보증으로 반지하 방에서 지내는 집이나 아빠 돌아가시고 집을 빼앗길 위기에 놓인 집, 모두 맛있는 음식 서로 나눠 먹고 어려울 때 서로 도우며 비슷비슷 살고 있으니까요. 차이라면 운동화가 ‘나이키’냐 ‘나이스’냐 정도랄까.



다시 로세토 연구로 돌아가 보면, 가난한 이민자들의 공동체 로세토 사람들은 같이 모여 살며 이탈리아어를 사용하고 그들의 문화를 지키던 시절에는 다른 지역 사람들보다 월등하게 건강 수준이 높았습니다. 공동체의 강한 결속이 건강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지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로세토 지역에서도 후손들이 영어를 사용하게 되고 미국 사회에 편입되어갔는데요. 그러면서 오히려 지역의 건강은 악화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마도 주류사회에서 느끼는 불평등, 상대적 박탈감 같은 심리사회적 요인이 악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새해를 맞았습니다. 가뜩이나 어려운 살림, 올해도 경제전망은 썩 밝지 않다는 뉴스가 들려옵니다.

절대빈곤은 옛이야기가 된 우리나라, 국민의 건강을 생각한다면 경제성장률을 얼마나 올릴지보다는 불평등을 얼마나 줄일지에 정책의 초점을 맞춰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마을’을 꿈꿀 수 있길,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돌보며 건강하게 살아가는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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