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이제는 풀어야 하는 매듭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아들을 기다리는 집의 둘째 딸로 태어나 은근한 듯 뚜렷한 차별 속에서 자라 대학을 졸업한 뒤 홍보회사에 다니다 결혼하여 아이 낳고 직장을 그만두고 '독박육아'를 하는, 그러다 갑자기 정신이 이상해진 82년생 김지영 씨의 이야기입니다.
책을 읽다가 우리 한의원에 다녀간 '김지영'이 몇이나 될까 궁금해 검색해봤더니 스물다섯 분이었었습니다. 그중에는 82년생 김지영 님도 세 분이나 있었지요. 실제로 김지영이라는 이름은 82년에 태어난 여성들에게 가장 흔한 이름 중 하나라고 하는데요. 흔한 이름만큼 소설 속 이야기도 어디선가 보고 경험한 듯한 나와 내 주변의 아주 일반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저보다 십 년이나 늦게 태어난 김지영 씨의 삶은 저희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한의대 전체 학생 수의 10% 밖에 되지 않았던 여학생들은 대부분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지만 막상 졸업하는 시점에 '우리 과에서는 여학생은 안 뽑아'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대학병원 수련의 자리를 포기해야 했고, 지금도 한의사 선후배 모임에 가보면 출산 후 한의사로 일하는 비율은 절반에 훨씬 못 미치니까요.
저출산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아이를 낳지 않는 여성을 이기적이라고 몰아붙이기도 하고 '모성'을 숭고하고 신성한 본능으로 치켜세우기도 하지만 아이를 낳은 후에 송두리째 포기해야 하는 여성의 삶에 대한 고려는 저출산 대책 어디에도 없습니다. 종일 아이와 씨름하며 퇴근 시간도 없이 종일 집안일을 하는 김지영 씨가 유모차를 끌고 가서 겨우 커피 한잔 마시는데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 가지고 호강하는 '맘충'이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지요. 억울하고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스스로의 결정이라 포장되었기 때문에 김지영 씨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대신 다른 여성들의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지요.
성차별이 어디 있냐고, 요즘은 여성이 살기 좋은 시대라고 강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김지영 씨의 삶은 어머니 오미숙 씨와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습니다. 어머니처럼 남자 형제를 위해 학업을 포기해야 하지는 않았어도 임신과 출산 후 그동안의 노력과 결실, 그리고 꿈을 다 포기해야 했으니까요. 그리고 김지영 씨는 한 살 된 딸을 생각했을 겁니다. 적어도 딸이 살아갈 세상은 나와는 달라야 한다는, 그래서 힘들더라도 내가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절실한 마음의 표출이었을 겁니다.
대선을 앞두고 많은 정치인이 여성정책을 이야기합니다. 어느 국회의원은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국회의원 모두에게 이 책을 선물했다고 하지요.
이 책에는 과장도 극적 효과도 없습니다. 너무나 현실적이고 예측 가능하여 더욱 마음이 아픈 이 시대의 자화상입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인정할 때 그로부터 한 발짝 나아갈 수 있지요.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려면 어떤 비용이 들더라도 이 매듭을 풀어야 합니다. 꿈을 포기해야 얻을 수 있는 모성이라면 누구도 여성에게 이를 강요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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