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에서 드리는 조금 긴 편지 “더 깊은 만남을 위한 잠시의 이별을 앞두고…” 요즘엔 유독 2003년 여름이 자주 생각납니다. 백일이 막 넘은 둘째 아이를 당시 살던 집 아래층 아주머니께 맡기고 개원준비를 시작했던 그 때가 어른거리곤
하네요. 그 아이가 벌써 열 살이 되었으니 그만큼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움여성한의원, 생뚱맞게도 ‘자궁(womb) 한의원’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했습니다. ‘여성의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건강을 위하여’라는 거창한 모토를 내 걸구요. 그렇게 십년을 보냈습니다. 진료실에서 환자분들을 만나면서 감사하게도 좋은 인연도 많이 맺었고 과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특히 임신을 기다리며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여성들을 만나는 일상은 제게 도전이기도 했지만 큰 보람이었습니다. 그동안 태어난 800여 명의 아가들, 개원 초기에 태어난 아이들은 벌써 학교를 다닐 나이가 되었네요. 그
잉태의 순간에 미력이나마 함께 할 수 있어서 참 감사했습니다. 한의학적 치료를 통해 균형 잡힌 최적의 건강상태, ‘육체적
건강’을 돕기 위해 노력했고 NLP(neuro-linguistic programming) 기법을 통한
마음 다스리기, 심리전문가와 함께 하는 집단상담, 개인상담
등을 통해 ‘정신적 건강’을 함께 챙기려 했습니다. 그렇지만 늘 마음 한편에 빚처럼 남아 있는 것이 ‘사회적 건강’에 대한 아쉬움이었습니다. 개인이 아무리 건강하고 싶어도 건강할
수 없는 사회적 환경, 정상/비정상으로 여성의 몸을 구분하고
도구화하는 사회적 시선과 권력들, 심각하게 의료화(medicalization)되고
있는 여성의 생식건강까지. 이에 대한 막연한 염려, 걱정,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하다는 걸 절감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시점이 하나의 매듭을 짓고, 재충전과 함께 새로운 학습을 시작해야할 적절한 시기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오랜 고민 끝에 어려운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올해 가을학기부터 영국 북부의 Durham University에서
의료인류학(Medical Anthropology)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나이도 많고 기억력도 쇠퇴하고(^^) 어찌 잘 할 수 있을지
한편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동안 많은 환자들과 만났던 임상경험, 한의학을 공부하며 전인적(全人的)으로 건강을 바라보았던 관점이 새로운 공부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습니다. 마흔 넘어 새롭게 나서는 길에, 정리해야할 것도 많고 두렵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합니다. 그 중에서도 다른 것들은 그냥 감수하고 결단하면 되는 일인데, 가장 주저되고 결정을 어렵게 했던 것은 바로 진료실에서 만나는 환자분들이었습니다. 짧든 길든 인연을 맺고 ‘건강’이라는, 또는 ‘건강한 임신’이라는
목표를 향해 함께 나아가던 분들을 어찌 두고 가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좋은 선생님을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좋은
병원, 좋은 자리에 계신 분이라 차마 말씀드리기 어려웠는데 흔쾌히 와주겠다 하셔서 무거운 마음을 조금
덜고 최종 결정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새로 오시는 선생님은(자세한 소개는 다시 곧 하겠습니다. 지금은 아직 다른 병원에 근무 중이셔서요.) 저와 같은 병원에서
수련의 과정(인턴, 부인과 레지던트)을 마쳤고, 같은 대학원에서 학위과정(한의학 석·박사-한방부인과 전공)도
하셨습니다. 다만, 제가 개원 후 로컬에서 환자를 보는 동안
선생님께서는 병원에서 부인과 과장으로 환자를 보시고 한의과대학에서 부인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셨지요. 2010년에는
반복유산환자의 한방치료 효과에 대한 논문을 저와 함께 쓰기도 하셨습니다. 게다가 저와 같은 마을에 살면서 아이를 키우고 있고, 심지어는
저랑 이름도 같습니다(!). 오랫동안 저와 함께 공부하고 함께 환자를 치료해 온 동료이자 실력 있는
전문가이시기 때문에 제 치료의 연장선상에서 저와 똑같은 진료, 아니 이를 넘어서는 양질의 진료로 환자분들의
건강을 잘 맡아주실 거라 믿습니다. 저는 7월 말까지 진료를 하고 8월 첫 주에는 새로운 선생님과 인계를 시작할 예정입니다. 저도 영국에서 블로그를 통해 보다 넓은 관점에서 보는 건강이야기들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인연을 맺은 모든 환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공부 잘 마치고 2014년, 더욱 실력있는 한의사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2012년 7월 9일 진료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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