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임약, 일상에서 이야기하기 참 어려운 주제입니다.
이성애자 성인 여성이라면 누구나 일상에서 고민하고 계획하는 지극히 현실적 문제이면서도 제대로 된 정보를 찾기 어렵고 의논할 상대도 마땅치 않습니다.
'피임까지 맡기진 마세요'라며 피임은 여성이 챙겨야 하는 거라고 강요하면서도, 피임을 이야기하는 여성은 '헤픈 여자'로 몰아붙이는 사회적 편견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그나마 60~70년대 베이비붐 시대에는 정부가 나서서 피임을 강조하더니, 요즘 같은 저출산 시대에 피임은 아무도 관심 없는 찬밥신세가 되었지요.
한국여성민우회에서 피임약의 당사자, 여성들이 모여 이야기하는 자리를 마련해서 다녀왔습니다.
2012년 정부는 의약품 재분류를 하면서 그동안 논란이 있었던 사후피임약을 의사처방전 없이 약국에서 구입할 수 있는 일반의약품으로, 대신 경구피임약을 처방전이 필요한 전문의약품으로 바꾸는 방안을 마련하였습니다(참고: '사후피임약, 일반의약품 전환 논란)'. 그러나 모두가 '여성건강'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각자 다른 생각을 하는 의약계, 종교계 등의 반대로 3년간 유예기간을 갖기로 했고, 이제 다시 결정의 순간을 맞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간의 논란, 결정 과정에서 여성 당사자의 목소리는 빠져있습니다.
저 또한 논문을 통해서만 피임약이 여성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살폈을 뿐, 여성들이 피임약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듣는 기회가 드물어서 이날의 솔직한 수다 자리가 반갑고 기대되었습니다.
-피임약은 정말 안전한가?
피임약 담론에서 여성들이 가장 궁금해하고, 한편 불안해하는 것인 피임약의 안전성입니다.
'피임 효과는 확실하다고 하는데, 혹시 건강에 해롭지는 않은지….'
이날 모임에서도 많은 여성이 비슷한 질문을 했습니다. 성교육을 지도하는 선생님 한 분도 과연 청소녀들에게 '피임약은 건강에 아무 문제 없으니 복용해도 된다'고 자신 있게 권해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요.
많은 의료전문가는 피임약은 안전하다고 합니다. 보통의 약들이 가지고 있는 정도의 사소한 부작용들만 있다고요.
맞는 이야기입니다. 안전성이 확인되었기에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거고요 여성건강에 미치는 장기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우려할만한 결과들도 있습니다. 덴마크 연구에서는 피임약 복용이 난소 예비력을 감소시킨다는 결과도 있었고요. 혈전 응고위험이 있기 때문에 35세 이상 흡연자에서는 경구피임약 복용을 피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거창한 '부작용'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의사들이 말하는 부작용과 환자가 우려하는 부작용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피임약을 복용하는 중에 나타나는 기능성 자궁출혈, 소화장애나 두통, 피임약을 중단한 후 불규칙해진 월경 등을 의료진들은 호르몬제를 조절하는 피임약을 복용하는 중에 흔히 나타날 수 있는 사소한 불편으로 여길 수 있으나 여성들에게는 피임약을 복용하지 않았더라면 겪지 않았을 뚜렷한 일상의 불편함일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라 피임약이 초래할 수도 있는 불편함을 알지만, 그럼에도 선택할 수 있는 개개인의 결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피임약은 여성을 자유롭게 하는가?
피임약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발명품으로 꼽히기도 합니다. 스스로 원하지 않는 임신을 조절할 수 있기에 서구에서는 여성해방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피임약에 대한 인식에는 사회/문화적 환경의 차이가 있습니다. 일본은 피임약 판매가 오랫동안 제한되었는데 많은 서구여성이 일본 여성들을 향해 왜 이런 정책에 저항하지 않느냐고 비난섞인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그러나 피임약에 대한 일본 여성들의 인식을 조사한 한 연구에서 일본 여성들은 피임약으로 여성의 몸이 인위적으로 조절되고 남성에게 피임의 면죄부를 줄 수 있는 피임약 복용을 여성해방의 개념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여성들의 피임약 복용 인식을 조사한 연구를 발견하기 어렵지만, 저조한 피임약 복용률은 정보 부족이나 무지가 아니라 아마도 피임약을 바라보는 우리만의 사회/문화적 맥락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피임을 이야기하자
많은 여성의 불만은 도대체 피임을 상담할 수 있는 전문가가 없다는 것입니다. 피임약 재분류화 논의에서는 모두가 피임약의 위험성을 주장하고 여성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의사/약사)가 관리해야 한다고 하지만, 막상 어디에서도 자세한 피임상담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떤 참가자는 병원에서 "그런데 왜 피임을 하느냐?"는 말도 안 되는 질문을 받기도 했고, 약국에서는 상담은커녕 어색한 기운만 감돌다 얼른 돈만 지불하고 나오기 일쑤라는 이야기에 많은 분이 공감하기도 했습니다. 국제보건기구(WHO)에서는 자세한 피임가이드라인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개개인의 건강상태, 선호도, 사정에 따라 가장 적합한 피임법을 선택하도록 안내하는 것이죠. 아래 사진과 같은 원형 바퀴 모양의 도구를 돌려서 본인에게 맞는 최적의 피임법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요.
나에 대해 잘 알고 있고, 편안하게 상담할 수 있는 주치의를 만난다면 피임에 대한 안내도 자세히 받고 나에게 맞는 피임법을 선택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텐데요. 또한 여성들이 사용하는 다양한 피임법에 대한 생생한 경험들을 함께 나눌 수 있는 편안하고 안전한 공론의 장이 마련되면 좋겠습니다.
-함께하는 피임
가장 안전한 피임은 두가지 이상의 피임법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중 한가지는 콘돔이어야 합니다. 콘돔은 유일하게 성병예방까지 하는 피임법이기때문입니다. 성을 즐기는 것이 함께라면 이에 대한 책임도 함께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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