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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 다이어리

생식기능과 환경

by 움이야기 2014. 2. 9.

기나긴 인류의 역사 속에서 본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고고학적, 생물학적 설명을 빌리지 않더라도 지금의 우리는 수십만년 전의 인류와는 확연히 다릅니다. 겉모습 뿐만 아니라 우리 몸의 생리적 기능도 현저히 달라졌는데, 이 진화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자연선택 (natural selection)' 입니다.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한 개체가 가장 많은 자손을 남기면서 이 유전자를 번식시키고 이어가는 것이지요. 여기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가 바로 '환경'입니다. 흔히, 우리의 몸을 설명하는 과학과 의학은 변치 않는 객관적 사실이라 여겨지는 경우가 많지만 어떠한 환경과 맥락 속에서 이해되느냐에 따라 이는 건강이 되기도 하고 질병이 되기도 합니다. 


건강한 자손의 재생산이 진화이론에서도 가장 중요한 목표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우리 몸의 여러 생리적 기능 중에서도 생식기능이야 말로 환경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 추측을 확인해보기 위해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래서 이를 대신 한 것이 피임을 하지 않으면서 비교적 인류의 조상들과 비슷한 형태의 생활방식을 유지 하고 있는 전통 부족을 대상으로 생식기능의 변화를 살펴보는 연구방법이었습니다. 


오랜 기간의 자세한 참여관찰 연구 결과 전통부족의 여성들의 임신과 출산률이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공통적인 것은 수렵, 채집으로 에너지를 많이 쓰거나 음식을 많이 확보하기 어려운 계절에는 임신률이 현저히 떨어지고, 계절적으로 음식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시기에는 임신률이 현저히 높아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러한 임신율 저하를 단지 영양이 부족해서, 에너지가 부족해서 발생한 생식기능의 저하로 보는 것은 너무 단순한 시각입니다. 에너지가 부족한 시기에 나타나는 생식기능 억제는 단순한 '병리'가 아니라 복잡한 계산 끝에 나온 가장 전략적인 '선택'이며 '적응'이기 때문입니다.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우리는 '성장'도 해야하고, '생식'도 해야하고, 또한 몸을 '유지'해야 하기도 합니다. 이 자원이 '생식'에만 지나치게 쓰이게 되면 되려 에너지가 부족해지고 몸을 유지하지 못하면서 생존자체에 위협을 받기도 하고, 또한 현재의 생식에 투자하다가 막상 남은 에너지가 없어 다음번 생식을 이어가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총 재생산의 수와 질은 최적의 결과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한정된 자원을 언제, 얼마만큼 생식에 할당할 것인가가 진화의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현재의 환경이 성공적 생식을 위해 썩 좋지 않을 때, 즉 과도한 노동, 부족한 에너지 등으로 에너지의 발란스가 깨어질 때는 에너지를 현재의 생식에 쓰는 대신 비축하다가 적절한 때 사용하는 것이 긴 관점에서 볼 때는 오히려 성공적인 재생산의 비책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류는 '생식에 우호적이지 않은 환경에서는 재생산 기능을 억제한다', '이는 병리가 아니라 적응이다'라는 가설이 진화학적 관점에서 생식기능을 연구해 온 생식 생태학자 (reproductive ecologist)들의 주된 관점입니다. 


음식 섭취를 통한 에너지 흡수와 노동이나 운동을 통한 에너지 소비 사이의 균형, 질병으로 인한 면역기능의 부담, 고산지대 등 실제 거주하고 있는 환경이 생식기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실제 에스트로겐, 프로게스테론 등 생식호르몬의 변화를 살피는 연구들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습니다. 그 결과 영양부족, 과도한 노동, 질병 등으로 육체적 스트레스가 높은 환경에서는 여성 호르몬 수치가 현저히 저하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육체적 스트레스 상황에서의 생식력의 저하를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정신적 스트레스와 생식기능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 이렇다할 합의된 결과가 나와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임신률이 떨어질 것이라는 막연한 심증과 일부 실험실 연구들이 있기는 하지만 실제 인류의 사회적 거주환경 속에서 정신적 스트레스와 생식기능 사이의 관계를 증명하는 것이 방법론적으로도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육체적 스트레스 못지 않게, 아니 이를 넘어서는 과도한 정신적 스트레스의 압박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정신적 스트레스와 생식기능저하의 관계를 밝히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연구가 될 것입니다. 


이와 함께 이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발생시키고, 지속시키는 근본적인 원인인자가 무엇인지를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찾아보는 것은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꿈꾸는 우리 모두에게, 특히 건강한 임신을 기다리며 임신의 어려움이 그저 개인의 문제라 생각하며 자책하는 여성들에게 얽힌 실타래를 푸는 작은, 그러나 중요한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