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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에세이

피임약, 감당할 수 있는 부작용이란

by 움이야기 2016. 8. 17.



'피임약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레고리 핀커스(Gregory Pincus)는 세계 최초의 피임약 개발을 앞두고 약물의 뛰어난 효과에 흥분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푸에르토리코 의과대학의 에드리스(Edris)라는 의사가 피임약을 복용한 여성의 17%가 메스꺼움, 어지러움, 두통 등 부작용을 호소하고 있다고 보고했을 때도 단순히 '신경성'이라고 무시하며 밀어붙였죠. 결국 피임약은 1960년 미국 FDA의 승인을 얻게 되었고요. 하지만 피임약의 뛰어난 피임 효과와는 별도로 약물 부작용은 계속 보고되었고 이후 에스트로겐 용량을 줄인 2세대 피임약, 합성 프로게스테론의 분자구조를 바꾼 3세대 피임약을 거쳐, 현재 4세대 피임약인 야즈/야스민이 전문의약품으로 처방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야스민을 처방받아 복용 중이던 여성 한 명이 사망했다는 기사가 보도되었습니다(<경구피임약 '야스민' 주의보··· 복용 후 사망 환자 또 발생>). 2012년에 이어 국내에서 두 번째 발생한 피임약 부작용 사망 사례입니다. '어쩌다 발생한 의료사고를 침소봉대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야즈/야스민 복용 후 사망사고는 캐나다에서 수십명(최소 23명), 미국에서 100명 이상이 보고되어 있습니다. 이는 4세대 피임약에 포함된 프로게스틴 성분, 드로스피레논(Drospirenone) 때문인데요. 전 세대 피임약에 비해 혈관에 혈전을 유발하는 정맥혈전색전증(venous thrombolism) 위험이 1.5-7배가량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맥에 혈전이 생겨 폐로 가는 혈관을 막으면 생명을 위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피임약은 위험한가요, 아니면 효과에 비하면 부작용은 미미하니 안전하다고 봐도 될까요?

모든 약이 마찬가지지만 피임약 또한 '위험하다/안전하다'의 이분법으로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위험하다면 무엇에 비해 위험한지', '그 위험은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인지', '위험을 감당하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무엇인지'를 잘 따져봐야 합니다. 위험은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되며, 같은 위험이라도 시대, 공간의 맥락에 따라 더 위험하기도, 덜 위험하기도 하니까요.


최근 캐나다 맥길(McGill) 대학의 사회학자 Alina Geampana는 야즈/야스민 부작용 보고 후, 미국과 캐나다에서 벌어진 피임약 논란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조사하여 이를 비판적으로 분석한 논문을 발표하였습니다.




미국 FDA나 캐나다 보건당국, 여러 보건 단체는 야즈/야스민 논란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했는데요. 대부분 약물의 안전성을 강조하며 '피임약 부작용보다 임신 부작용이 훨씬 위험하다'는 담론을 적극적으로 유포하였습니다.




위와 같은 자료를 사용하여 피임약 복용자는 겨우 만 명 중에 3~9명 정도 혈전이 생기지만 임신을 하면 5-20명, 출산 후에는 40~65명이나 혈전이 생기니 그에 비하면 피임약 부작용은 미미하다는 설명입니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한 이야기지요. 하지만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것은 '피임약 복용이 아니면 꼭 임신인가?'하는 점입니다.

제대로 된 피임 정보가 없고 낙태가 엄격하게 금지된 시대와 사회에서는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지요.

두리뭉실 '피임약'이라고 표현했지만 야즈/야스민보다 혈전 위험성이 낮은 전 세대 피임약도 있고, 피임 효과가 좋으면서 부작용도 없는 '콘돔'도 있지요. 하지만 이에 대한 언급 없이 '피임약 위험이냐, 임신 위험이냐'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피임약밖에 다른 대안이 없었던 과거의 위험(risk) 분석방식일 뿐이라고 저자는 비판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자는 위험을 대하는 사회적 태도가 성별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참 진행 중인 남성 피임약 개발에서는 사소해 보이는 위험, 성욕감퇴 등이 주요한 이슈로 다뤄지고 있는 반면에, 여성 피임약의 부작용에 대해서는 '어쩌다 일어나는 사망' 외에 다른 불편함은 부작용으로 간주하지 않고 있으니까요. 그저 '임신보다는 덜 위험하니 참으라'는 메시지만 지속해서 보내고 있고요.


한편 성차별적인 마케팅 방식도 문제입니다. 사실 4세대 피임약 야즈/야스민은 2, 3세대 피임약보다 피임 효과가 뛰어나지는 않지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오히려 혈전 발생 위험은 훨씬 높고요. 제약회사가 강조하는 4세대 피임약의 장점은 이전 피임약이 가지고 있는 체중증가 부작용을 줄이면서 여드름 개선 효과가 있다는 점입니다. 결국 '여성에게는 외모가 가장 중요하니 건강의 위험쯤은 감수해도 되지 않느냐'는 성차별적 인식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위험이라면 감당할 수 있을까요?

그건 상황에 따라, 개인에 따라 다를 겁니다.

피임약 말고는 다른 피임의 옵션을 선택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을 거고, 사소한 부작용조차 감수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을 거고요.

중요한 것은 정확한 정보를 취합한 후 이득과 위험을 따져 최종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피부가 깨끗해지는 사소한 이득 뒤에 드물지만, 혈전 발생이라는 치명적인 위험이 있다는 사실, 피임약 말고도 다른 효과적이고 안전한 피임이 있다는 사실을 포함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