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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 다이어리

[움다이어리] 다시 수유리에서 - 고정희

by 움이야기 2011. 6. 14.

다시 수유리에서

 

이제는 수유리를 떠나야 한다고

은밀히 내 심중에게 말하고

은밀히 수유리의 바람에게도 말했습니다.

 

이제는 수유리에서 자유로와야 한다고

한국신학대학 푸른 청솔에게 말하고

4년 동안 조기가 게양되었던

수유리 하늘에게도 귀띔했습니다.

 

이제 수유리는 수유리가 아니라고

경기도 양산리를 향해서 한번 말하고

찢어진 우리의 교기를 향해서도 한번 크게 외쳤습니다.

 

연희동에 13평 전세아파트를 계약하고

길일을 따져 이삿날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친구여

나는 수유리를 떠나지 못했습니다.

 

계약금을 날리고

아파트의 자유를 날려버리면서도

나는 수유리의 흡인력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습니다.

개인주택 지하 1층에 살면서

에프엠 수신이 불가능하다 해도

하루 세 시간씩 출퇴근길에 파김치로 흔들린다 해도

수유리에 묻는 내 꿈을 버릴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수유리에 뿌리내린 이 나라의 기원이

눈부시게 휘날리는 날을 위하여

뜻맞은 우리 몇사람

수유리에 모여 앉아

뜨겁고 뭉클한 믿음을 포개며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말자함을 알았습니다.

 

올해는 고정희 시인이 지리산에서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지 20주기 되는 해입니다.

<또하나의 문화>를 중심으로 한 시인의 친구들은 매년 시인을 기리는 행사를 하고, '고정희 청소년 문학상'을 통해 이 시대의 소녀들과 이 곳에 없는 페미니스트 시인의 만남을 주선하고 있습니다.

특히, 올 해는 20주기를 맞아 <고정희시전집> 발간을 준비하고 있는 중입니다.

 

고정희 기념사업회에서 정성스러운 손글씨로 써서 보내주신 시입니다.

'수유리' 반가운 이름이었습니다.. ^^

그러고 보니 저도 이 곳 수유리에서 여성들을 만난지 9년째네요.

수유리의 어떤 기운들이 시인을 붙잡았을까요.

4.19 즈음에 보이는 학생들의 행렬, 색색의 등산복으로 산을 찾는 무리들..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삼각산의 기운은 아닐런지요.

 

오늘 고정희 시인의 시를 만나며 여성의 노동과 사랑, 희망을 노래하던 이 '여성주의 시인'이 새삼 그리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