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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 다이어리

<문현주 원장의 여성건강 365일> 낙태 바라보기

by 움이야기 2011. 10. 18.

*여성신문 연재 칼럼 <문현주 원장의 여성건강 365일>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문현주 원장(움여성한의원) 1156호 [건강] (2011-10-17) http://www.womennews.co.kr/news/51113

낙태 바라보기

“비난과 훈계가 아닌 몸과 마음의 회복 도와야”



산아제한에서 출산장려까지, 여성의 몸은 통제의 수단?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한 명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

한 반에 칠십 명이 넘는 학생들, 그것도 교실이 모자라 오전, 오후반을 나누어 수업했던 그 때. 70년대, 80년대에 학교를 다녔던 이들에게는 익숙한 구호입니다.

당시 정부는 강력한 ‘산아제한’ 정책을 효과적으로 집행했습니다. 아이를 많이 낳으면 뭔가 세련되지 못하고 전근대적인 여성인 듯 바라보는 이데올로기가 형성됐고, 여기에 행정력과 의료기관을 동원한 피임시술이 제공됐습니다. 결국 1955년 6.33명이었던 한국여성의 출산율은 50년 만에 세계 최저 수준인 1.2명대로 떨어졌습니다. 이는 국가가 여성의 몸을 효율적으로 통제한 결과입니다.

북적북적한 환경에서 자란 세대들이 이제는 부모가 되었지만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습니다. 아이 하나를 키우고 교육시키는데 드는 비용은 맞벌이 부부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섭니다. 아이 키우며 일할 수 있는 사회적 보육지원도 여전히 부족하고요. 때문에 여성들은 ‘자발적 산아제한’을 시작하고 우리는 이를 ‘출산파업’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들에게 국가는 이제 저출산이 문제가 된다며 ‘아이를 더 낳으라’고 읍소하거나 혹은 겁박합니다.

‘당근’과 ‘채찍’으로 어르기도 했다가 위협하기도 하는 국가의 출산장려정책의 단골손님은 ‘낙태금지’입니다. 특히 작년에는 ‘프로라이프 의사회’의 고발로 인공중절을 시술한 의사에게 실형이 선고되면서 여러 논란과 문제들이 발생했는데요. 사실 대한민국에서 낙태가 합법적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다만 산아제한이 필요한 때에는 국가가 나서 부추기거나 묵인했던 낙태를 갑자기 엄격히 금지하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는 국가 정책을 위해 여성의 몸을 통제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선택이 아닌 강제일 수 있는 낙태, 단죄보다는 치유와 회복에 관심을

낙태를 이야기하면서 겉으로는 ‘생명존중’을 내세웁니다. 하지만 생명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소중한 것이지요. 낙태를 하는 여성이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기 때문에 낙태를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요.

낙태에 대한 다양한 논의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왜 여성이 낙태를 결정할 수밖에 없는가’라고 하는 낙태의 결정과정과 맥락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원하지 않는 임신을 했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없다면 낙태는 선택이 아닌 강제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낙태의 옳고 그름을 도덕적으로, 법률적으로 단죄하기 보다는 낙태 이후의 몸과 마음의 치유와 회복에 보다 관심을 가져야하지 않을까요.

한편 부득이하게 인공유산을 하고 한의원을 찾는 여성들은 ‘혹시 불임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가장 많이 합니다. 또한 불임치료를 위해 온 여성들 중에도 ‘혹시 과거의 낙태경험 때문에 임신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닐까’를 염려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습니다.

최근 영국 NHS(National Health Service)에서는 여러 연구결과를 종합하여, “어떤 임상적 시술도 위험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인공유산은, 특히 임신 12주 이전에 이루어진다면 여성의 건강에 거의 위험을 유발하지 않는다.”라고 공식발표했습니다.

다만, 유산을 하고난 후 조리와 회복은 매우 중요합니다. 초기에 이루어지는 유산이라도 인위적으로 임신을 중단하면 몸은 급격한 호르몬 변동을 겪게 되고 이로 인해 신체적 불편과 부작용이 많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공유산 후 몸이 여기저기 쑤시고 아픈 ‘산후풍 유사증상’도 바로 이 경우에 속합니다. 또한 자궁소파술을 한 이후에는 염증이나 유착 위험도 발생할 수 있고요. 이러한 후유증이 불임으로 이어지기도 해서 수술 후에 꼼꼼히 치료받고 경과를 살피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출산이나 자연유산과 달리 낙태를 한 여성들이 주위 도움을 받으며 편하게 조리하고 회복하기가 쉽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자신을 위해 특별한 조리의 시간을 갖는 것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합니다.

‘죄책감’은 ‘임신을 방해하는 마음’이 될 수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마음의 회복입니다. 낙태반대론자들이 ‘생명의 존엄성’을 강조하지 않아도 부득이하게 생명을 보낸 여성들에게 인공중절은 큰 아픔이고 상처입니다. 아픔을 슬퍼하고 애도하고 치유하는 과정이 꼭 필요합니다. 그냥 빨리 잊고 싶은 나쁜 기억쯤으로 묻어버리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지요. 충분히 애도하지 못한 슬픔은 무의식 속에 남아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방해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임신한 아이를 부득이 낳지 못하는 낙태의 경험이 아픔과 슬픔을 넘어 ‘죄책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낙태를 반대하는 사회의 윤리적, 도덕적 프레임에 갇혀 스스로를 ‘죄인’으로 규정하고 내면화하는 것이야말로 인공유산 후 여성의 몸과 마음의 회복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무의식 속에 남아있는 죄책감은 자기처벌의 형태로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자기도 모르게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는 한의학적으로 보면 기(氣) 소통의 장애를 가져오고, 정신적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호르몬의 불균형, 순환장애 등 다양한 신체적 증상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낙태 자체가 ‘임신이 안 되는 몸’을 만들지는 않지만, 이로 인한 죄책감, 불안감은 ‘임신을 방해하는 마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낙태, 무조건 반대보다는 토대를 함께 만들고 회복을 도와야

원해서 낙태를 하는 여성은 없습니다. 낙태는 불법이라서 안하는 것도, 합법이라서 마구 하는 것도 아닙니다. 피임에 대한 정확한 정보, 피임을 함께 상의할 수 있는 동등한 성관계, 자녀양육에 대한 사회적 지원과 호의적 조건, 다양한 가족형태를 인정하는 사회적 분위기. 이러한 토대를 함께 만들어 가면서 그 속에서 ‘낙태’에 대한 논의를 진지하게 풀어가야 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여성들이 부득이한 낙태를 경험하며 이로 인한 몸과 마음의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비난하지 않기, 따뜻하게 격려하고 보듬어 안기, 그리고 잘 치유하기.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비난과 훈계가 아니라 몸과 마음의 온전한 회복입니다.

문현주 원장(움여성한의원)
1156호 [건강] (2011-10-17)